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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씨 문화를 만든 조선시대식 작명법 본문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족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조선초부터이며, 이때부터 양반 중심의 족보 문화의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족보 문화의 확산은 반상의 차이를 더욱 엄격하게 구분 짓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뿐만 아니라 성씨(姓氏)를 중심으로 한 같은 문벌 간의 결속을 촉진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부계사회 중심 체제가 더욱 공고해지는 사회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성관(姓貫) 중심의 집중화 현상이 부계 사회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15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성(姓)을 바꾸는 경우는 종종 있어 왔었는데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에서는 절대 불가하였으며 매우 엄격하게 관리된다. 성(姓)의 고착화는 조선 사회, 문화에 큰 특징이 되어 버린다. 그 후 조선에서는 성(姓)을 바꾸는 일은 목숨을 바꾸는 일처럼 되어 버리는데 이렇게 된 기저에는 본관(本貫) 중심 문화가 정착되면서 나타나게 된 현상이었다. 조선시대는 성관(姓貫)을 기반으로 한 문벌 귀족 가문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성관(姓貫)은 한 가문에 있어 신분의 상징이 되었으며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성관(姓貫)의 문화는 더 이상 이름의 문화가 아니었으며 목숨과 바꿀만한 정치적 상징성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를 기록한 서적에 따르면 조선 왕조는 예(禮)를 중시하는 예치 사회(禮治社會)라 한다. 예치 사회는 말 그대로 예(禮)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 사회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서 조선이 예치 사회로 발전함에 따라 사회 각 분야별로 예적 질서가 확산되었다. 예적 논리가 중요시된 사회에서 이름과 관련된 문화 역시 예적 질서에 맞게 세분화된 이름 예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인이 된 양반의 이름은 더 이상 함부로 부를 수 없게 되었으니, 관례(冠禮=성인식)를 치르고 나면 본명은 왕이나 부모와 스승과 존장 외에는 양반가 자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조선의 이름 예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예법을 어기는 것은 무례한 행동으로 치부되었으므로 성인식 이후 본명을 부르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니 이는 사회적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이거니 와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예적 질서에 의하면 윗사람에 대해 자신의 본명을 말하지만 동년배나 그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본명 대신 자(字)나 아호(雅號)를 사용하여 불렀다. 이름은 더 이상 단순한 기호 체계가 아니었으며 조선 사회에서의 이름은 그 이상의 의미와 지위를 가지게 된다. 이름은 한 가문을 대표하는 의식으로 문화 깊숙이 뿌리 내리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이름의 다양성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결국 여러 종류의 이름이 활성화 될 수밖에 없었는데 자(字)나, 호(號)등이 지식층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고, 시호(諡號) 또한 고려 시대보다 확대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이름 예법이 생겨났으나 이 모든 것은 양반을 위시한 식자층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이고 여성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체계는 확연한 신분제와 사회적 차별을 만들게 되었으며 그들만의 중심 사회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자(字)나 호(號), 시호(諡號)는 양반 신분에서만 사용하는 양반의 전용 이름이며, 문화였으며 여성을 비롯한 그 외의 신분들은 거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이름 대신 별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이름의 다양성이 펼쳐진 사회인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이름을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했다.
조선조 후대인 18세기 들어오자 지배 체제를 동요시키게 되었는데 이는 부의 축적으로 신흥 세력이 등장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부의 축적에 의해 등장한 신흥 세력은 경제적 지위는 높았으나, 정치적 사회적 지위까지 격상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정치 정면에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서구의 신흥 세력처럼 그들만의 독자 세력을 형성하기에도 사회적 한계가 존재하였다. 여기에는 조선만의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주류 세력으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사대부 가문의 성(姓)과 본관(本貫)을 가져야 하는 통관 절차가 필요한 것이 사회적 현실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사회적 중심 세력으로의 역할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으니 조선은 양반으로 대변되는 세력이 국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법적 제도적 장치는 그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신흥 세력들이 어느 족보에 편입되는 통관 절차를 거치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양반 사회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었으므로 신흥 세력들이 독자 세력을 형성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사회 상황으로 되어 있었다. 서구의 경우 신흥 세력의 등장이 정치 참여로 이어져 자기들만의 세력을 완성해 나갈 수 있었으나 조선의 경우 정치 참여를 위해서는 성관(姓貫)을 가져야 하는 장애물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성씨 문화를 형성한 조선시대는 신흥 세력들이 정치권에 개입하는 것을 상당히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 예치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신흥 세력에 의한 사회 변화는 조선의 경우,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만의 특이한 상황임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만의 특유한 성씨(姓氏) 문화가 근대 새로운 세력의 활동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성(姓)과 본관(本貫)의 문화는 너무나도 간격이 넓은 계층 간의 진입 장벽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특이한 구조 때문에 왕정의 붕괴는 물론 근대 사회로의 전환을 더디게 했을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의 근대사 연구에 있어서 근대 신흥 세력들이 독자적 세력화를 꾀하지 못한 여러 이유들 중에 이름의 문화가 하나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확인해봐야 할 중요 대목이라 보인다.
전 국민이 성(姓)을 갖게 된 것은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 이며 모든 사람이 성(姓)과 본(本)을 가지도록 제도화되면서 국민 모두가 성씨(姓氏)를 취득하게 되었다. 신라를 기준으로 해도 실로 1500년 만에 이룩한 획기적인 사회상의 변화이다. 그러나 일제가 아니더라도 백성 모두가 성(姓)을 갖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7세기 말엽부터 신분제가 이미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 계급이 급격히 타파되면서 성(姓)의 대중화가 촉진된 것 또한 중요한 사실로 이름으로 구분된 신분제가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민적법의 시행으로 오랫동안 이름으로 구분 지어진 신분제의 굴레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는 우리 사회 문화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성(姓)과 본관(本貫)의 취득은 신분제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것이다. 더 이상 반상의 차별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모든 백성들이 자기의 능력에 따라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성(姓)의 취득은 혁명 없이 평등을 실현한 것이다. 나 스스로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맞이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으며 오늘과 같은 사회를 만드는데 밑바탕이 되었다고 사료된다.
우리나라에 성씨(姓氏) 문화가 도입된 고대 이래로 성씨(姓氏) 문화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왔다. 누군가에게는 자부심이 되었으며 또 다른 누구에게는 끊을 수 없는 한 많은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다. 개인 능력에 앞서 어느 가문에 속하느냐가 그 개인의 삶에 중요한 기준점으로 작용하였던 세상은 모든 사람이 성(姓)을 취득함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성의 취득은 모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위대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姓)의 문화는 뼈에 각인될 만큼 사무친 문화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문자의 탄생 이후, 그전에 이름만 사용하던 동아시아인 들은 성(姓)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고안하게 된다. 성(姓)의 고안은 신화적 원형을 넘어 인간 중심과 문명사회로의 회귀를 예고하는 것으로 인간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 성(姓)의 도입은 이름의 변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姓)과 함께 사용된 이름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데 지역이나 신체의 특징을 나타내던 고유어식 이름에서 문자 위주의 한자식 이름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름의 글자 수도 한 자, 또는 두 자로 간결하게 된다.
성(姓)과 문자로 된 이름의 사용은 오행 성명학 탄생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데 오행 성명학은 성(姓)이 있어야 이름의 판별이 가능한 이론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자식 이름의 사용은 글을 아는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문화이므로 지배층의 문화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의 성명학(姓名學)의 출발은 식자층과 집권층에서부터 시작된 문화라 말할 수 있다. 성(姓)이 없거나 한자(漢字) 이름이 없는 백성들은 성명학의 적용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명학에 대한 발생 근거와 문헌적 자료가 미약한데 반해 오행(수리) 성명학의 시조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는데 학계에 따르면 오행 성명학(五行 姓名學)은 1929년 일본에서 구마사키 겐오(熊崎健翁)가 성명의 신비(姓名の神秘)를 발표하면서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구마사기(熊崎)는 최초로 수(數)를 성명의 한자 획수에 적용하는 성명학을 만들었으며 이 성명학이 1945년 이후, 1950대 말까지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 후 꾸준히 확산되어 현재에 이르러서도 모든 성명의 한자 작명 기법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아무런 검증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성명학은 성과 명을 일정하게 정해 놓은 원리에 고정하여 성명의 바르고 바르지 못함을 판별하여 인간 행복 추구에 도움되는가를 검증하는 학문이다. 오행 성명학 역시 정형화된 일정한 법칙에 의해 이름을 살펴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정형화된 법칙은 몇 가지로 구분되어 있으며 이름 판별 시 오행 성명학에서 요구하는 기본 법칙들을 모두 만족시켜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바른 이름이라고 인정되는 것이다.
음, 양의 탄생은 태극에서 기원하며, 태초의 우주라는 태극이 음과 양으로 나누어져 음양이 생성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만물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서로 대립되는 속성을 음양 이론이라 하며 사용하고 있으나 정확한 표현은 대칭적 개념으로 나타내는 것이 이론적 원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물을 파악하는 인식의 수단으로서 모든 물질은 이 범주 안에서 작동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문헌적으로 살펴보면 설문해자(說問解字)를 통해 음양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데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 등 태양이 비치는 곳을 양(陽), 산의 북쪽과, 강의 남쪽 등으로 그늘진 곳을 음(陰)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명학에서는 이름 판별 시 음과 양의 조화를 가장 먼저 살피게 되는데 음양의 변화는 생명 변화의 기본법이기 때문에 이름의 변화를 살피는 첫 순서로 음양의 조화를 먼저 살피는 것이다. 음, 양으로 성명을 판별하는 법은 이름자의 한자 획수를 중심으로 음과 양의 배합을 살펴보는 것이다. 숫자에도 음양이 있다. 때문에 획수도 작명할 때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이름이 모두 양(陽)으로만 구성이 되면 양은 활동성이고 적극성이며 행동이 앞서다 보니 차분히 살피는 면모가 미비하여 허점을 노출하게 된다. 이름이 모두 음(陰)으로만 구성이 되면 소극적이며 추진력이 약하고 독립심 약해 기회가 오더라도 흘려보내게 된다. 음과 양의 기운이 잘 조화를 이루면 양단간의 균형을 이루게 되니 실패의 확률을 줄이게 된다. 음양이 중화되면 평온한 감정 상태를 유지하며 모든 일에 결실을 이루게 될 것이라 보는 것이며, 전부 양이나 전부 음 등 한 가지 기운으로 치우쳐 있으면 감정이 왜곡되고 결실 없는 삶으로 이끈다고 보고 있다.
오행에는 다섯가지 요소가 있다. 그 요소는 바로 나무를 뜻하는 목, 불을 뜻하는 화, 물을 뜻하는 수, 토양을 뜻하는 토, 금속을 뜻하는 금이다. 오행 관념이 철학적으로 승화된 것은 은나라 말기이다. 고문헌의 최초 언급은 기자(箕子)가 서술한 상서(尙書)이며 홍범(洪範)에서 오행을 언급하였다. 서주 말년 사백에 의해 오행이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인 것으로 언급되었고 그 후 물질 운동의 자취와 유형을 제공하였는데 이것이 오행 생극설이다. 대자연의 변화 현상을 규칙적으로 설명하는 설명 체계인 것이며, 오행은 운동 형태를 표현한 것이지 자연계의 물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행의 이론에 의하면 세상 만물은 다섯 가지의 기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다섯 가지 기운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순환하고 변화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기도 오행의 변화 속에 있으며 다섯 기운의 변화에 의해 세상의 형상도 달라지는 것이라 보고 있다. 오행의 성질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리고 진동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까지 오행의 범주에 속한다고 설정한다. 따라서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체계에도 있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오행과 함께 생장과 소멸의 과정을 거치고 다시 다섯 가지의 근본적인 기(氣)로 환원된다고 보았다. 오행에는 상생과 상극의 관계가 존재한다. 오행이 상생의 관계에 있을 경우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협조를 잘하게 되어 삶을 안정적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상생 오행에는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의 관계가 있다. 오행이 상극의 관계에 있을 경우 경쟁적이고 협력이 어려우며 일의 진행에 장애가 많이 생긴다고 보았다. 좋은 점은 변화를 불러일으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는 역할이 있다고도 보았다. 상극 오행에는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 금극목의 관계가 있다.